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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hong Lim

林群鴻  임군홍(1912-1979)
​Information

임군홍, 삶과 함께 한 예술

김인혜 미술사가

  임군홍의 작품을 처음 보고 놀란 것은 2002년의 일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입사하자마자 미술관의 근대미술 소장품으로 전시를 급히 만들라는 ‘지시’를 받고, 소장품을 스크린하고 있었다. 이 중 1930-40년대에 제작된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임군홍의 작품들에 눈길이 갔다. 유화의 크기도 크고, 화풍도 매우 다양해서, 어떻게 이 시기 한국에 이런 작가가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소녀상>(1937)은 몇 번의 붓질로 인물의 형태를 표현해내는 기법이 압권이라 흡사 마네를 연상시켰고, <모델>(1946)은 과감한 화면 구성과 색채 선택이 마티스 못지않은 대담성을 보였다. 한 화가가 평생을 모색해도 하나의 양식을 만들기 어려운데, 임군홍이라는 화가는 어떻게 이런 다양한 양식을 짧은 시기에 섭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품의 소장 경위를 조사해보니,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임군홍 작품 5점은 1985년 월납북 작가 해금 무드가 고조되던 시기 그의 개인전을 미술관에서 개최한 후,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시 막바지에 마침 그 유족, 임군홍의 차남인 임덕진 선생이 미술관을 찾아주었고, 그렇게 유족과의 인연도 시작됐다. 아버지의 작품을 평생 보관하며, 그림을 통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그는, 여전히 임군홍의 작품을 시장에 내놓기보다 잘 보존해서 공공의 자산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장에 작품이 나와서 몇 억에 팔렸다는 기사가 나야, 그 작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세상이 아닌가. 임군홍이라는 작가를 대중에게 좀 더 알리고 싶다는 오랜 열망을 안고, 일단 임군홍의 작품을 모조리 펼쳐 보이자는 심산으로 이번 예화랑 전시가 준비된 것으로 안다.

 

1. 성장과 창업: 회화의 매력

  임군홍(본명 임수룡)은 191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원래 그의 선조는 무관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거상(巨商)이었던 부유한 집안이었다. 개화기에 상업에 종사한 만큼, 시대의 변화와 조류에 민감했던 개방적 집안이었다고 생각된다. 어머니는 경주 최씨로, 그 시절 대단한 가문의 부잣집 출신이었다.

임군홍은 9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제들이 대부분 일찍 죽어서, 종래에는 임군홍이 부모님을 모시며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임군홍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임군홍의 형이 원래 있었는데, 그가 사회생활을 못하게 되면서 집안이 급격히 곤궁해졌다. 형 임점룡은 경기고등보통학교를 전교 2등으로 졸업할 만큼 총명하여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나, 일본 유학 중 일본인 여성을 사귀었다는 이유로 강제 귀국 당했다. 이후 아버지의 강압으로 조선인 여성과 결혼했으나 며칠 못 가 헤어진 후, 평생 문밖을 나오지 않는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았다. 임군홍의 부친은 장남이 그렇게 되자 투전에 빠져, 결국 가산을 탕진해 버린다. 임군홍이 주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해야 했던 1920년대 말 집안 상황은 그렇게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는 어머니의 친척이 운영하는 치과에서 기공사로 일을 하며,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

임군홍이 미술에 재능을 보인 것은 주교보통학교 재학시절이었다. 이 학교에는 김종태(1906~1935)라는 걸출한 인물이 교사로 있었다. 김종태는 거의 독학으로 유화를 연마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과 특선을 거듭하다가 조선인 최초로 서양화부 추천작가가 된 화가였다. 애주가(愛酒家)이자 안하무인의 기인(奇人) 행각으로 유명했던 그는, 천재적인 감각으로 몇 번의 붓질만으로 대상의 원근감과 볼륨감을 잡아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의 대표작 <노란 저고리>(1929)를 보면, 어린 소녀의 앳된 인상과 한복의 주름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데, 가까이에서 다시 보면, 이런 표현이 불과 몇 번의 대담한 붓질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는 이런 작품을 워낙 빠른 필치로 소화해서, 20분 만에 작품을 완성했다고 하니, ‘마술’ 같은 실력이었다.

임군홍은 그런 김종태의 탁월한 능력을 좇기 위해 애쓴 것으로 생각된다. 임군홍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초기작에 김종태의 영향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 <소녀상>(1937)이 대표적인 예이다. 임군홍은 ‘노란 저고리’ 대신, 진한 남색의 세련된 원피스를 입은 신여성을 그리고 있지만, 발그레한 볼터치나 흰색 칼라의 주름 처리에서 김종태의 영향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대담한 붓질로, 이차원의 평면 캔버스에 입체적인 형태감을 표현하는 회화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서, 그는 이러한 기법을 더욱 연구하고 연마해나갔다.

1930년대 임군홍은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운영하는 야학을 다녔으며, 틈틈이 개인 화숙에서 회화 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그는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1936년 임군홍은 치과에서 함께 일하던 신여성 간호사 홍우순과 연애결혼을 한 후, 이듬해 ‘예림스튜디오’라는 세련된 이름을 내건 디자인회사를 창업했다. 간판 제작에서부터 포스터 디자인, 무대장치, 실내장식 등을 사업 분야로 내걸었다.

 

2. 중국 생활과 화가 활동

 

1) 중국 진출과 한커우 정착

  임군홍은 자상하고 따뜻하고 책임감이 강한 가장(家長)이었다. 연로하신 어머니와 문간방에서 나오지 않고 책만 읽는 형님, 그리고 부인과 자녀들을 부양하면서, 그는 화가로서의 꿈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험을 걸어야 했다. 사업의 중국 진출에 도전한 것이다.

1939년 임군홍은 먼저 혼자 중국 일대를 주유하며, 사전답사 겸 스케치 여행을 떠났다. 만주를 거쳐 베이징 일대를 여행하며 틈틈이 작품을 제작했고, 돌아오는 길에 당시 만주국의 수도 신징(新京, 현 장춘)에서 《김혜일, 임군홍 이인전》을 성황리에 개최하기도 했다. 숨 막히는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피해 만주에 터를 잡았던 만선일보사의 문예인들, 염상섭과 박팔양 등이 찬조회를 조직하여 열어준 전시회였다.

중국에서 사업의 가능성을 본 임군홍은 1940년 부인과 함께 한커우(漢口)에 정착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절친이었던 엄도만과 동업하여, 화루가(花褸街) 45번지에 ‘한커우 미술광고사’를 열었다. 경성에서 시작했던 디자인사업의 확장판으로, 영화관이나 벽화 광고, 버스 광고, 실내 인테리어, 기념 카드나 엽서의 제작 등 다양한 디자인 및 인쇄 사업을 펼쳤다.

한커우는 현재 중국의 우한(武漢)에 해당하는 곳이다. 원래 이 지역은 양쯔강과 한수이(漢水)강을 사이에 두고 구분되는 한커우, 한양(漢陽), 우창(武昌)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가, 1927년 ‘우한’으로 통합, 명명되었다. 우한은 중국 대륙 한복판에 위치해 있다. 내륙이면서도 ‘중국의 시카고’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는, 우한이 거대한 장강(長江, 양쯔강)을 따라 대륙 깊숙이 들어온 곳에 위치한 중요 항구도시이기 때문이다. 1858년 텐진조약으로 강제 개항된 이후, 우한은 일찌감치 여러 나라 조계지가 들어선 식민지적이면서 국제적인 모습을 갖춘 도시가 되었다.

우한은 양쯔강을 통해 황해에서 엄청나게 많은 배들이 동서를 가로질러 내륙으로 접근할 수 있는 중요한 뱃길이었으며, 동시에 한수이강을 통해 대륙의 남북으로도 이어지는 접점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1906년에는 한커우에서 베이징을 연결하는 경한철로(京汉铁路)가 완성되었고, 1936년에는 우창과 광저우를 잇는 철도가 개설되면서, 뱃길과 철길이 만나는 최고의 교통 요지가 되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우한 주변에는 각종 지하자원의 매장량이 풍부해서, 공업이 발달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한커우에서 한양 쪽을 바라보며 그린 임군홍의 스케치에 높은 공장 굴뚝들이 열을 지어 등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같은 시기 조선에서는 볼 수 없던 첨단 산업공단이 우한에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임군홍은 한커우의 번화한 항구와 철도역 등 도시의 중요 상징물을 작품으로 남긴 적이 있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 한커우에 머물렀던 역사학자 이정식의 회고록을 보면, 이 시기 한커우가 얼마나 번화했으며, 또한 위험천만한 도시였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우한의 일본인 조계지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이정식은, 중일전쟁 중 주변 지역에서 격전을 벌이고 참패하여 본영으로 돌아오는 일본군 행렬을 몰래 보다가 들켜서, 잡혀갈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우한은 이 시기 중일전쟁의 접전지로, 돈도, 물자도, 군인도, 사람도 많이 들고났던, 도전적인 동시에 위험한 도시였다.

 

2) 중국에서 그린 작품: 한커우 vs 베이징

  리스크를 건만큼 사업도 크게 성공했다. 임군홍은 한커우에서 디자인, 광고, 인쇄 사업으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중국과 조선에 있는 가족을 부양하는 동시에, 자신의 꿈인 그림 그리는 일을 틈만 나면 실행할 수 있었다. 약 6년간의 중국체류 기간 동안 임군홍은 한편으로 한커우에서 생업에 종사하며 주변의 인물과 풍경을 그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베이징에 가서 ‘화가’로서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마음껏 펼쳤다. 

흥미로운 점은, 한커우와 베이징 두 곳에서 각각 그린 그의 작품들은, 작품의 소재뿐 아니라 화풍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한커우에서 생활인으로 사는 동안, 임군홍은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 즉 가족과 이웃을 주로 그렸다. 그의 아들과 딸이 여기서 태어났으니, 화가의 자녀와 아내가 작품의 소재가 된 것은 당연했다. 임군홍이 그린 여러 점의 가족 그림은 이들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애잔한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어, 보는 이에게 생생한 감동을 준다. 임군홍은 또한, 항구의 뱃사람, 정육점 주인, 화루가의 평범한 일상 풍경 등을 화폭에 담았다. 국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듯, 작품에는 중국인과 서양인 등 다양한 인종이 등장하기도 한다.

화풍의 측면에서 보면, 한커우에서 제작된 그림은 상대적으로 사실적이고 기록적이며, 조금은 어둡고 우울한 정조를 띈 경우가 많았다. 그의 한커우 생활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커우에서 그린 작품 중 가장 압도적인 두 작품은 <여인상>과 <행려>이다. <여인상>은 중일전쟁의 혼란 속에서 가슴을 유린당해 유두에 구멍이 뚫린 여성의 지친 모습을 그린 작품이고, <행려>는 온 몸이 헐려나간 채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나병 환자의 남루한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 두 작품에서도 임군홍은 각기 다른 화풍을 구사했는데, 전자의 작품이 검은 윤곽선과 두껍고 거친 붓질을 강조한 표현주의적 경향을 띤다면, 후자는 어둡고 단조로운 색채에 극적 명암표현으로 형태를 잡은 인상주의 양식에 가까운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은 화가가 곤경에 처한 주변인들에게 얼마나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한편, 기법적으로는 그가 대상의 소재에 따라 얼마든지 수시로 그림의 양식을 바꿀 수 있는 화가였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주말이나 연휴가 생기면 임군홍은 어김없이 기차를 타고 베이징으로 향했다. 베이징에서 그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도 대체적으로 한커우에서의 작업에 비해 밝고 활기찼다. 그는 베이징에서 야외 사생을 주로 했는데, 특히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스팟’이 있었다. 베이징의 상징인 자금성(당시는 주로 ‘고궁’이라고 불렀다), 자금성 외곽의 각루, 그리고 베이징 서북쪽 교외에 위치한 이화원 등이 그가 자주 가는 장소였다. 도교의 전통 사상을 상징적으로 조형화한 천단공원의 ‘기년전’도 그가 좋아했던 곳이었다. 이 특정 장소를 매우 반복적으로 방문한 화가는 그때마다 각기 다른 계절과 날씨, 시각, 그리고 화가의 다양한 감흥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작품을 여러 개의 버전으로 그려나갔다.

이는 모네가 루앙 대성당을 그리고, 세잔이 생 빅토와르 산을 반복해서 그린 것과 유사한 작업 방식이다. 그러나 임군홍이 이들의 작품과 달랐던 점은, 같은 대상을 놓고도 작품의 양식이나 작품이 주는 ‘효과’가 매우 폭넓고 다양했다는 사실에 있다. ‘기년전’ 시리즈만 하더라도, 어떤 작품은 밝게 반짝이는 빛의 향연을 통해 생생하고 화사한 느낌이 강조된 반면(도판 8), 어떤 작품은 매우 흐릿하고 어둡고 불길한 분위기가 화면을 엄습하는 식이다(도판 9).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빛의 관찰에 기초한 작업을 했다면, 임군홍은 대상을 통해 자신이 느낀 직접적인 ‘감흥’ 자체에 훨씬 더 집중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일종의 ‘정조(情操)’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생생함, 쓸쓸함, 적막함, 고요함, 아련함, 평온함 등과 같은 다양한 정조가 임군홍의 베이징 풍경화를 지배한다. 그는 이런 정서를 회화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해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화가였다.

한편, 베이징에 가면 임군홍은 골동품 거리 유리창에 반드시 들러서, 조선시대 중국을 드나들었던 조선인의 글씨나 그림을 사서 경성으로 보내는 일도 했다. 간송 전형필이 임군홍의 주고객이었다. 임군홍의 이런 ‘발굴’로 인해, 어떤 자료가 간송미술관에 유입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향후 흥미로운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3. 귀국과 월북: 미완성의 ‘가족’

  한커우에서 그는 다복한 가정을 꾸렸고, 사업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1945년 2차 대전이 종결되어 한반도 정세는 급변했고, 중국은 극심한 내전 상황으로 내몰렸다. 임군홍은 어수선한 시국을 피해, 1946년 초 귀국길에 올랐다.

정치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혼란 그 자체였던 해방공간에서, 임군홍은 여전히 자신의 사업을 계속했다. 골동을 취급하는 일은 ‘우보당’이라는 상점에서, 디자인 및 인쇄 관련 일은 ‘고려광고사’라는 회사에서 운영했다. 번화한 중국의 대도시에서 일했던 노하우를 적용하여, 서울에서도 대규모 일거리를 따냈다. 전국 기차역의 광고판을 운영하거나 지역 관광지의 홍보 브로슈어를 제작하는 일도 했다. 운수부(교통부에 해당)에서 의뢰한 신년 달력을 제작하는 일도 따냈는데, 거기서 사달이 났다. 1948년도의 신년 달력에 그린 그림이 문제가 되어, 경찰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1948년 3월 10일자 경향신문과 조선중앙일보 기사 내용을 보면, 철도운수국 여객계의 서기 이덕구는 “남로당 철도국 본국분회 서기부장 겸 운수과 세포 책임자”로 “화가 임군홍과 엄도만과 공모하여” 운수부의 홍보달력에 “남조선 과정(過程)을 전복하고 소련식 공산주의국가를 건설하는 의미의 도면을 그렸다”고 되어 있다. “인물은 최승희로 하고, 그가 쓴 갓은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적색으로 하고, 갓끈에는 소련의 17연방을 의미하는 구슬 17개를 그리고, 최승희가 소지한 부채에는 삼팔선을 상징하는 선을 그렸다”는 식으로 도안을 해석했다.

기사 내용에 의하면 타깃이 된 인물은 운수국 내부 좌익 성향의 서기 및 과장급 인사들로 보이는데, 정확히 알 수 없는 정치적 알력에 임군홍과 엄도만 두 화가는 희생양이 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들이 그린 그림이 1946년 7월 월북한 최승희인지 혹은 그녀를 닮은 일반적인 무용수인지조차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다. 도안에 대한 묘사 내용을 보면, 달력 그림은 단순히 ‘한국미’를 대표하는 전형적인 이미지의 종합판이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두 화가에게 회복할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이들은 수개월간 조사를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국민대통합 차원에서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군정청 군정장관이었던 윌리엄 프리시 딘(William Frishe Dean)이 1948년 3월 31일자로 발행한 특별 사면서에 임군홍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사면서에는 대상자들을 아무런 조건 없이 즉시 사면하며, 시민권과 선거권을 보장하라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사면 복권된 후 임군홍은 수염을 깎지 못하고 초췌하기 그지없는, 짧은 시간에 노인의 모습이 되어버린 자신의 자화상을 남겼고, 새장 속에 갇힌 초라한 새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억울한 이야기를 글로 남길 수도 없던 시절, 그는 그림을 통해 당시의 심경을 기록했던 것이다.

1950년 6월, 남북의 정치 상황이 극단에 치달아 전쟁이 터졌다. 임군홍은 이 무렵 명륜동 집에서 <가족도>)를 그리고 있었다. 곤히 잠든 차남 임덕진을 끌어안고 상념에 잠긴 부인의 모습, 턱을 괴고 천진하게 앉아있는 장녀가 등장하는 그림이다. 부인의 배 속에는 유복자로 태어난 막내가 있는 상태였다. 집 안에는 각종 골동품들이 이리저리 놓여 있고, 뜰 앞에 핀 백합이 삐죽 화면에 끼어들어 있다. 임군홍이 평소 좋아하는 것들을 종합선물세트처럼 한 화면에 구성한 작품이다.

미완성에 그친 이 그림은 임군홍이 남한에서 그린 마지막 유작이 되었다. 1950년 9월 국군의 서울 수복 후, 임군홍은 북으로 갔다. 한때 좌익으로 찍힌 그가 일단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북으로 간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했듯이, 몸을 피한 순간의 선택이 영원히 남쪽의 가족과 이별하는 결과를 낳게 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부인 홍우순은 시어머니와 시아주버니, 그리고 다섯 자녀의 생계를 위해 처음에는 골동품을 팔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뛰어난 음식솜씨를 발휘하여 배오개 시장(광장 시장)에서 간이식당을 꾸렸다. 그리고는 2평짜리 자신의 가게를 갖게 되면서, 평생 과일과 야채를 파는 장사를 해서 식구를 먹여 살렸다. 홍우순은 1982년 타계할 때까지 임군홍의 ‘부활’을 보지 못했다. 부인이 액자도 없이 캔버스 천을 돌돌 말아 부피를 줄여 상자 속에 몰래 보관해오던 작품들은, 1984년 차남 임덕진을 통해 처음 빛을 보게 되었다. 그 후로도 언 40여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임군홍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낯선 것은 통탄할 일이다.

 

4. 임군홍 작품에 대한 재평가

  현재 남아있는 임군홍의 유화 작품은 약 130점에 이르는데, 이는 모두 1930년대 중반에서 1950년까지 약 15년 사이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이 시기 조선의 화가들 중에서 이 정도 규모의 유화 작품을 남긴 이는 매우 드물다. 임군홍 외에는 배운성, 이쾌대 등 주로 월북한 화가들이 1930-40년대 작품을 상당량 남한에 남겨 놓았을 뿐이다. 박수근, 이중섭 등 월남한 화가들이 이 시기 작품을 모두 북에다 남겨두고 내려온 것을 생각하면,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우리에게 남겨진 이 작품들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양화계를 이해하고 실증하는 데 있어 너무나도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임군홍의 작품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앞으로 좀 더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한편으로는 생계를 위해 디자인 사업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로서의 아이덴티티를 위해 고투했다고 볼 수 있다. 생계로 시작한 것이라 해도 디자이너로서의 임군홍 또한 그의 선구적인 역할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화가로서의 임군홍의 위치도 재평가될 여지가 많다. 특히 종래의 해석에서 임군홍의 작품이 단지 여러 서양의 양식을 모방하고 시도한 것에 그쳤다는 평가는 재고를 요한다. 그의 작품이 다양한 양식을 받아들인 것은 맞지만, 그는 이 양식들을 화가가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정감을 나타내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임군홍은 무엇을 대상으로 어떤 느낌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먼저 생각한 후, 매우 주도적인 방식으로 기법과 양식을 자유자재로 선택하고 구사했다. 성공한 디자이너로서 임군홍이 가진 유연하고 도전적인 태도가 회화 작품을 제작하는 데에도 일정 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인물화, 풍경화, 정물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고, 서양화의 여러 화풍을 소화해 나갔으며, 종국에는 자신이 대상을 대면한 순간 느낀 ‘정감’을 자유자재의 회화 기법으로 구현해낼 수 있었다. 이러한 진전의 과정은 화가 스스로에게 대단한 기쁨과 성취감을 안겼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임군홍이 온갖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화가이기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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