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촉(筆觸): gesture
2025.11.01. - 12.05.
전시 서문
글/김주원
“파리의 분위기는 평상시의 나의 생각을 더욱 견고하게 굳힌다.
예술의 세계는 무턱대고 공부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가 문제인 것 같다.
(…) 소리 없이 흐르는 세느강변의 새벽 정적이 이따금 잎새 스치는 바람 소리로 흔들린다.
그 음악 속에서 나는 아침마다 그림을 그린다.”
-임직순, 「파리의 여름」, 『꽃과 태양의 마을-운창 임직순 화문집』, 康美文化史, 1980
1973년, 화가 임직순(任直淳, 1921-1996)은 프랑스 파리에 체류하며 아침마다 그림을 그렸다. 이백 년 전 문을 연 몽파르나스의 6층 호텔에 투숙하며 지냈던 임직순의 파리 체류 기간은 그의 예술세계에 중요한 전환 계기의 하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머물렀던 몽파르나스는 이른바 ‘에콜 드 파리(École de Paris, 파리파)’등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주로 활약하던 구역 중 하나다. 예컨대 모딜리아니와 샤갈, 피카소와 칸딘스키, 고갱과 마티스, 아폴리네르와 헤밍웨이, 스트라빈스키 같은 예술가들은 이곳에 모여 예술과 새로움을 논쟁하고 독자적인 미학적 실험을 주저 없이 감행하곤 했다. 현대미술을 탄생시킨 예술가들의 감수성이 남아있던 파리 몽파르나스에서의 생활과 거리 풍경은, 임직순으로 하여금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지독하게 자극했던 것 같다. 자신의 화문집 『꽃과 태양의 마을』(1980)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침마다’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게 했고, 더불어 ‘과연 나를 어떻게 불사를까’를 거듭 되묻게 했다.
세계 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 거리와 뤽상부르 정원(jardin du Luxembourg), 샤토 드 쏘(Château de Sceaux) 등의 전형적인 프랑스식 정원 풍경이나 호텔 실내 안팎의 정물, 풍경 드로잉은 임직순이 당시 직면한 예술적 사유와 도전 등이 짙은 흔적과 깊이를 드러내고 있다.
잘 알다시피 임직순은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구상미술(具象美術)의 중요한 계보를 형성한 작가이다. 특히 그는 ‘색채 화가’로 불리 울 만큼 자연 풍경과 꽃, 여인을 주요 소재로 삼아 인상주의적 화풍의 밝고 정감 있지만 과감한 색채를 구사해 왔다. 그의 색채 화가로서의 면모는 1936년 일본으로 건너가 회화적 기초를 다진 도쿄 일본미술학교(日本美術學校)에서의 유학 시절과 귀국 후 〈국전〉중심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선보였던 대담한 붓질과 뚜렷한 형태 감각, 정감 넘치는 표현이 두드러진 작품들 속에서 확인된다. 임직순은 활동 초기부터 줄곧 형태보다는 색채 표현으로 주목을 받았던 것 같다.
아름다운 주제/대상과 발랄한 감각에 들뜬 색채 표현에 집중되던 그의 작품은 1970년대 중후반부터 주제/대상과 색채에 내재된 생명력의 탐구로 전회(轉回) 했다. 일 년 가까운 임직순의 파리 체류와 개인전은 몇 차례의 일본 도쿄에서의 개인전 등 국제경험으로 이어지면서, 유럽과 일본의 인상주의들과는 다른 자신의 예술가적 체질과 색채에 대한 성찰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빛과의 만남에 따라 수없이 변화하는 색깔을 추구하는 것이 나의 오랜 작업이었지요.
그러나 이제는 색채 자체에 변화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연이 보여주는 어느 순간의 색이 아니라 본질적인 색을 찾고 싶어요.
이것은 ‘현장’으로부터 떠난 그림을 그리려는 변화와도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태양 아래서의 색이 아니라 내면의 색을 찾아야겠다는 생각, 눈으로 보는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그려야겠다는 강한 충동으로 캔버스 앞에 앉곤 합니다.”
- 임직순(장명수, 「소녀 앞에서 모자를 쓰고 있는 화가」, 『계간미술』27호, 1983년 가을, p. 29)
“…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단지 형체를 색채로 옮기는 단순한 일이어서는 안된다.
아름다움을 일깨워 주는 일, 사물 속의 숨겨진 진실을 일깨워 주는 일이다.
그것은 화가의 즐거움이자 모든 사람들의 즐거움이다.”
-임직순, 『꽃과 태양의 마을-운창 임직순 화문집』, 康美文化史, 1980
1976년 말, 임직순은 갑작스런 건강 악화로 한 달여의 병원 생활을 했다. 현장 사생을 통해 줄곧 태양 아래서의 대상/사물의 색채 변화와 환영을 재현하던 그는 이후 현장의 조건에 따라 변화되는 사물의 표면을 떠나 본질 혹은‘내면’을 탐구했다. 그의 말대로 ‘시각적인 진실에서 심각적(心覺的)인 진실로’의 전환을 모색했던 것이다. 대상의 외적인 스케일이나 전개를 주목하기보다는 내적인 체계를 파고드는 대범한 통찰의 발휘가 본격화 되면서 그의 그림은 사실(寫實)과 재현을 떠나 대담한 생략과 본질을 향한 단순 명쾌성의 강조로 이어졌다.
이러한 자연 풍경과 꽃, 여인 등 평범한 주제/대상을 ‘내적 체계’나 ‘내면의 생명력’이라는 미학적 문제로의 전회 과정에서, 날 것 그대로 인 드로잉은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 그야말로 내적 표현으로서의 필촉(筆觸, Gesture)이 예민하게 살아있는 드로잉은 주제/대상이 지닌 아름다움과 진실을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설레임과 감동, 집중과 공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목탄, 연필, 펜, 수채물감 등 하나의 미디엄으로 그린 간결한 드로잉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대상과 색채의 본질과 내면에 이르는 임직순의 예술 탐구와 노정은 1964년 8월경 예화랑의 시작이 된 천일화랑 설립자 이완석(李完錫, 1915-1969)에게 보낸 임직순의 편지 속 한 점의 ‘드로잉’(1964년 7월 31일/ 이완석 학형께/ 완도군(莞島郡) 보길도(甫吉島) 임직순 이라는 서명이 있다)에서부터, 광주, 경주, 남해, 문경새재, 한계령, 설악산 등의 1990년대까지 제작된 풍경, 꽃, 여인을 대상으로 한 드로잉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표면에서 내면으로의 전환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주제/대상과 색채의 내면을 탐구한다는 일, 그 깊이까지 밀어붙이는 임직순의 치열한 예술가적 기질은 그의 드로잉, 그 필촉으로 드러나고 있다.
